가짜 어사
Novel / 가짜 어사 · 무료 공개

제3화. 고개를 들라

EPISODE 03 / 05
공백 포함 12,380자 · 약 24분
목차 역사 고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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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증 ↓

1. 누각의 눈

관아 대문 곁, 담장이 꺾이는 모퉁이에 낡은 누각이 하나 서 있었다. 단청은 바랜 지 오래고 난간의 칠은 손톱으로 긁으면 부스러졌지만, 높이만큼은 쓸 만했다. 고을로 드는 길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난간에 이방이 서 있었다. 곁에는 둘째 사령이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이방의 손끝에는 접힌 편지가 쥐여 있었다. 솔목 호방이 밤길로 보낸 것이다. 밤새 만지작거린 탓에 접힌 자리마다 귀가 닳아 있었다.

누각 아래로 말라붙은 논이 펼쳐졌다. 갈라진 논바닥 사이로 고갯길이 흰 실처럼 내려오고, 그 실 끝에 사람 둘이 매달려 있었다. 갓 쓴 사람 하나, 봇짐 진 사람 하나였다.

이방은 한참을 말없이 보다가 낮게 입을 열었다.

“…저기 오는구먼. 갓 쓴 놈 하나에, 종 하나.”

둘째 사령이 침을 삼켰다.

“잡아들일깝쇼?”

이방은 대답 대신 입꼬리만 올렸다. 웃음이라기엔 입가에만 걸린 선 하나였다.

“막지 마라. …어디로 가나 보자.”

마을 길은 조용했다. 해가 한참 올랐는데도 문을 닫아건 초가가 많았고, 연기 오르는 굴뚝은 손으로 꼽을 만큼이었다.

길가에 여자아이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손에는 빈 그릇이 들려 있었다. 아이는 지나가는 갓을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눈이 컸고, 볼은 그만큼 홀쭉했다.

막동의 손이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호방이 쥐여 준 엽전 꾸러미가 거기 있었다. 손가락이 꾸러미를 감싸 쥐었다가 멈췄다. 갓을 쓴 양반이 길가에서 엽전을 풀 일은 아니었다. 막동은 손을 빈 채로 빼냈다. 등 뒤로 아이의 시선이 한동안 따라붙었다.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 곳에 닿았다. 한쪽은 담이 어깨를 맞댄 조용한 뒷골목이었다. 다른 쪽에서는 관아 쪽 고함 소리가 바람을 타고 올라왔다.

구렁이가 한 걸음 앞서 나서며 뒷골목을 가리켰다.

“나리, 이방 어른 댁은 이쪽이오. 호방 나리가 곧장 뫼시라 했으니.”

막동이 뒷골목을 보았다. 기별을 받은 사람의 집이었다. 문을 열면 차려진 밥상과 깍듯한 절이 기다릴 것이다. 막동의 걸음이 멈췄다.

그 문을 열기 전에 먼저 알고 싶었다. 누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관아부터 보자.”

구렁이가 실눈을 떴다. 막동의 옆얼굴을 한 번 훑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예이~”

누각에서 이방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갈림길에서 갓이 뒷골목을 외면하고 관아 쪽으로 꺾이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관아부터라.”

이방의 입에서 낮은 말이 흘러나왔다. 입꼬리에 걸려 있던 선이 천천히 풀렸다. 웃음이 걷힌 얼굴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2. 한 말

관아 앞마당에는 굶은 얼굴들이 줄을 서 있었다. 저마다 곡식 자루를 하나씩 끌어안고 있었다. 자루는 하나같이 가벼워 보였다.

줄 끝에 말(斗) 하나가 놓여 있었다. 검게 변한 나무가 손때에 닳아 반들거렸고, 테두리 한 귀퉁이는 이 빠지듯 떨어져 나가 있었다. 곁에는 평미레가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사령이 앞선 노인의 자루를 거꾸로 들어 곡식을 말에 부었다. 말 위로 수북이 솟아야 할 곡식이 테두리에 겨우 닿았다.

“고봉으로 채워야 한 말이지! 어디서 깎은 말을 내밀어!”

노인이 허리를 굽혔다. 마디 굵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으리, 집에 남은 게 이게 다요…”

사령은 들은 척도 않고 빈 자루를 걷어찼다. 아직 자루 입에 남아 있던 곡식이 흙바닥에 쏟아졌다. 노인이 휘청였다. 곁에서 치맛자락을 쥐고 있던 손녀가 빈 그릇을 껴안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한 말이 안 되잖느냐! 썩 물러가지 못할까!”

줄 끝에는 갓을 깊이 눌러쓴 사내가 서 있었다. 막동이었다. 구경만 하자고 마음먹었는데 몸이 그 마음보다 먼저 나갔다. 쓰러지는 노인의 겨드랑이 밑으로 어깨가 들어가 있었다.

노인을 받쳐 세운 막동은 곧바로 쭈그려 앉았다. 흙바닥에 흩어진 곡식을 두 손으로 쓸어 담았다. 갓이 기울고 소맷부리가 흙에 끌렸다. 체통은 어디에도 없었다. 낟알 한 톨이라도 남기지 않으려고 움직이는, 짐꾼의 손이었다.

곡식을 말 앞에 모아 놓고 막동이 평미레를 집었다. 노인의 곡식을 말에 다시 붓고, 평미레를 테두리에 대어 한 번에 쓱 밀었다. 남은 곡식이 말 밖으로 쓸려 나갔다. 말은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꼭 맞게 찼다.

“…말은 이렇게 깎는 겁니다요.”

입에서 나온 것은 양반의 말이 아니었다. 일 년 내 곡식 가마를 지던 하인의 말투였다.

줄 선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임이 번졌다.

“…한 말 맞네.”

“맞구먼.”

막동은 대꾸하지 못했다. 평미레를 내려놓던 손가락이 말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바닥까지 더듬어 내려가던 손가락이 문득 멈췄다. 눈썹이 천천히 모였다. 막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각 난간을 짚은 이방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바로 아래 마당이 내려다보였다. 흙바닥에서 맨손으로 곡식을 쓸어 담던 갓 쓴 사내와, 평미레를 쥔 손이 보였다. 너무 익숙한 손이었다.

“…양반 손이 곡식을 쓸어 담네.”

이방이 곁의 둘째 사령에게 턱짓했다. 사령이 귀를 기울이자 이방이 한마디를 더했다.

“…저 말.”

둘째 사령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누각 계단을 소리 나게 뛰어 내려갔다.

마당에서는 막동이 소매에서 엽전 꾸러미를 꺼내고 있었다. 호방이 노잣돈으로 쥐여 준 것이었다. 막동은 그것을 노인의 빈 자루에 쑥 밀어 넣었다.

“이, 이게…”

노인이 눈을 크게 떴다. 막동은 노인의 얼굴을 보지 않고 작게 말했다.

“…아이 밥이나 지어 먹이시오.”

그때 억센 손이 막동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관아 앞에서 웬 수작이냐!”

사령이었다. 막동은 앞섶을 잡힌 채 발이 반쯤 들려 끌려갔다. 노인은 입을 벌린 채 보고만 있었고, 손녀는 울음을 삼킨 채 자루 속의 엽전을 내려다보았다.

구렁이가 그 뒤를 따랐다.

“아이고, 아이고오~”

노래하듯 늘어지는 곡소리가 끌려가는 갓을 뒤따랐다.

3. 웬 놈이냐

관아 대문 앞에 막동이 내던져지듯 서게 되었다. 사령 둘이 좌우로 막아섰다. 그중 하나는 방금 누각에서 계단을 뛰어 내려온 둘째 사령이었다. 숨이 아직 덜 가라앉아 있었다.

“웬 놈이냐!”

첫째 사령이 호통을 쳤다. 막동은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열면 또 무슨 말이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둘째 사령이 말없이 막동의 손을 낚아챘다.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햇볕 아래 펼쳤다. 굳은살이 겹겹이 앉아 있었다. 지게 끈과 도끼 자루와 노가 하루하루 새겨 놓은 흔적이었다.

“이게 양반 손이야?”

둘째 사령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만, 고개 너머 선비 죽인 게 땋은 머리 종놈이라던데…”

막동의 손이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갓 속의 상투 쪽으로 가다 중간에서 멈췄다. 2화에서도 그랬던, 불안할 때마다 나오는 손버릇이었다. 막동은 올라가던 손을 억지로 꺾어 품으로 집어넣었다. 손끝에 딱딱하고 차가운 것이 닿았다. 마패였다. 닿았다가, 그대로 멈췄다.

바로 그때 구렁이가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얼굴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방금까지 실눈으로 흘리던 능청이 사라지고, 세상이 무너진 사람의 얼굴이 되었다.

“어이이이… 아이고, 나으리…”

구렁이는 사령의 다리를 덥석 붙잡았다. 정강이를 끌어안고 엉엉 우는 시늉을 했다.

“이 양반이 누군 줄 알고…”

울음소리는 끝을 모르고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이상한 것이 섞였다. 흐느낌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구렁이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입을 크게 벌렸다. 누런 이가 한 개도 남김없이 드러났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는데 입은 귀밑까지 찢어져 있었다. 우는 얼굴인지 웃는 얼굴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얼굴이 대낮의 관아 대문 앞에서 사령의 눈높이에 걸려 있었다.

“히히히히… 이 양반 품에 뭐가 들었는 줄 알고… 아이고 나으리 모가지… 히히히히…”

사령이 저도 모르게 한 발 물러났다. 다리를 붙들린 채라 물러나지도 못하고 주춤거렸다.

바닥의 구렁이가 눈을 들어 막동을 올려다보았다. 눈에는 웃음기가 조금도 없었다. 그 눈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이오, 나리.

막동은 그 눈을 받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대문 안쪽을 보았다. 활짝 열린 문 너머, 저 안 어딘가에 나리가 갈 곳을 미리 알고 있던 자가 있다. 그자가 어쩌면 지금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막동은 숨을 한 번 길게 들이마셨다. 굽어 있던 어깨를 폈다. 등이 곧아지고, 턱이 올라갔다. 나리처럼.

“에헴.”

낮고 깊은 소리였다. 이번에는 제대로 나왔다.

사령들이 서로를 보다가 킥킥 웃었다.

“에헴?”

“에헴이래.”

막동은 대꾸하지 않고 사령들을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보았다. 발끝에서 갓 끝까지 오르내리는 시선에 웃음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막동이 씩 웃었다. 그러고는 품에 손을 넣었다.

“나? …암행어사다.”

품에서 나온 것은 마패였다. 햇빛을 받아 말 문양이 번쩍였다.

웃던 사령들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었다.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이 갈 곳을 잃고 굳은 채 매달려 있었다.

흙바닥에 누운 구렁이가 하늘을 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히히히.”

4. 고개를 들라

사령들이 털썩 무릎을 꺾었다. 한 놈은 이마가 흙에 닿도록, 한 놈은 마패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엎드렸다.

그때 대문 안쪽에서 급한 발소리가 났다. 누각에서 내려온 이방이었다. 이방은 대문 안에서 버선발로 달려 나왔다. 신을 꿰찰 틈도 없었다는 듯한 걸음이었다. 마당 한가운데에 이르자 이방은 그대로 몸을 던져 엎드렸다.

“어사 나리… 기별 듣고 기다렸사옵니다.”

목소리가 구슬처럼 맑았다. 공손함이 지나쳐서 오히려 매끄러웠다.

막동의 무릎이 굽기 시작했다. 1화에서도, 2화에서도 그랬던 버릇이었다. 엎드린 어른을 보면 몸이 먼저 같이 엎드리려 했다. 입이 먼저 열렸다.

“아이고, 일어나십…”

막동은 말끝을 삼켰다. 꿀꺽 소리가 목에서 났다. 굽던 무릎을 억지로 펴고 턱을 들었다.

“…고개를 들라.”

이방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눈가의 주름까지 가지런히 접힌 웃음이었다. 그러나 눈은 웃지 않았다. 웃는 얼굴 한가운데 박힌 두 눈은 마른 우물처럼 막동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이방은 진짜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윤 나리, 고갯길은 편안하셨사옵니까.”

이방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밤길이 험하다던데.”

막동이 굳었다.

비가 쏟아지던 밤의 고개가 눈앞을 스쳤다. 빗줄기 사이에서 흔들리던 등불이, 푹 꺼졌다. 어둠이 왔다.

막동은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마패를 쥔 손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눌렀다.

“…묻는 말에만 대답하거라.”

이방이 몸을 더 깊이 숙였다. 이마가 땅에 닿을 만큼 숙인 등 위로 웃음 섞인 대답이 올라왔다.

“예, 예.”

그때 뒤쪽에서 낮은 소리가 났다.

“…이히히히.”

엎드려 있던 사령들이 고개를 들어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구렁이가 거기 서 있었다. 구렁이는 하늘의 구름을 세는 사람처럼 시치미를 뚝 뗐다.

막동은 엎드린 이방의 등을 내려다보았다. 곱게 접힌 도포 자락과 땅에 닿은 갓이 보였다.

기별. 솔목 호방이 밤길로 보냈다는 그 기별. 그것을 받은 자가 지금 발밑에 엎드려 있는 이자였다.

5. 높은 자리

동헌 대청의 높은 자리에는 두툼한 방석이 놓여 있었다. 비단을 씌운 방석이 햇볕을 받아 푹신해 보였다.

막동은 그 앞에 섰다. 양반답게, 어사답게 앉아야 했다. 무릎을 꿇으려는데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한쪽은 접히려 하고 한쪽은 펴지려 해서 두 다리가 서로 엉켰다. 몸이 휘청했다. 막동은 양팔을 허우적거리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나리, 위로…”

이방이 손으로 자리를 가리켰다. 얼굴에는 아까와 같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

막동은 방석 위에 엉거주춤 걸터앉으며 말했다.

“…방석이 배겨서 그런다.”

목이 뻐근해서, 배가 불러, 등이 허전해서에 이어 핑계 넷째였다. 이번에는 방석 탓이었다.

이방은 고개를 숙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령들도 고개를 숙였다. 아무도 웃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민망했다.

그때 안쪽 문이 열리고 사또가 비틀대며 들어왔다. 관복 고름은 풀려 흘러내렸고 얼굴은 술기운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걸음마다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서 곁의 아전이 따라다니며 받쳐야 할 판이었다.

“어, 어사 나리… 꺼억… 우리 풍곡현은… 태평성대… 꺼억.”

말끝마다 트림이 나왔다. 술 냄새가 대청을 가로질러 막동의 코끝까지 왔다.

이방이 재빨리 사또를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 그러고는 곁에 놓아둔 두툼한 책 한 권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막동 앞에 올렸다.

“올가을 세곡 장부이옵니다. 어사 나리께서 한번 살펴 주시옵소서.”

막동은 장부를 받아 펼쳤다. 종이 위에 빽빽한 글자가 줄지어 있었다. 글자라기보다 개미 떼가 줄 맞춰 기어가는 것 같았다. 막동은 까막눈이었다. 한 글자도 읽을 수 없었다.

그래도 들여다보았다. 오래. 눈을 부릅뜨고 미간을 모으고 턱을 쓸며, 읽는 시늉을 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방은 웃는 얼굴로 기다렸다. 사령들도 기다렸다. 사또가 꺼억, 했다. 그 소리가 대청의 정적을 한 번 갈랐다가 사라졌다.

막동이 한 장을 넘겼다. 또 넘겼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땀방울이 관자놀이를 타고 내려와 갓끈에 스몄다. 막동은 소매로 닦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어디, 이상한 데라도 있사옵니까?”

이방이 부드럽게 물었다. 물음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눈은 막동의 손끝을, 장부 위에서 멈춰 버린 손가락을 보고 있었다.

막동이 장부를 탁 덮었다. 종이 사이에 갇혀 있던 바람이 훅 일었다.

“…이런 건 밤에 혼자 본다.”

이방이 몸을 더 깊이 숙였다.

“예. 천천히… 보시옵소서.”

숙인 고개 아래로 이방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움직였다.

그때 사또가 손을 뻗어 이방의 손등을 토닥였다. 이방은 사또가 쓰러지지 않게 소매를 붙들고 있었다.

“이방, 이방이 다 아오… 다 알아서 하오…”

사또는 웃으며 말했다. 어린애가 어미에게 하는 말 같았다.

막동은 그 광경을 보았다. 사또의 풀린 고름과 벌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사또의 소매를 단단히 쥐고 있는 이방의 손을 보았다. 사또가 이방의 손을 토닥이고 있는지, 이방이 사또를 붙들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 고을을 쥔 건 저 손이다.

막동은 덮은 장부 위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이 땀에 젖어 있었다.

6. 그 말, 가져와 보거라

동헌 마당에 사령들의 발소리가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까 그 노인이 양팔을 잡힌 채 질질 끌려 들어왔다. 노인은 흙바닥에 털썩 꿇렸고, 곡식 자루가 그 곁에 내던져졌다. 어린 손녀가 노인의 베적삼 자락을 쥐고 따라와 옆에 주저앉았다.

막동은 대청 끝, 섬돌 위에 서 있었다. 이방이 한 걸음 나서며 소매를 모았다.

“어사 나리 행차 앞에서 소란을 피운 늙은이이옵니다. 엄히 다스려…”

“나으리… 한 말을 바쳤는데, 한 말이 안 된다 하옵니다요…”

노인의 목소리는 땅바닥에 눌려 갈라져 있었다. 막동은 그 굽은 등을 내려다보았다.

아까는 이 자리에서 입이 얼어붙었다. 갓은 머리에 얹혀 있는데 목소리는 제멋대로 떨렸다. 막동은 아랫배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아래로 깔았다. 이번에는 끝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 말, 가져와 보거라.”

이방의 웃음이 처음으로 굳었다.

하나, 둘. 딱 그 한 호흡이었다. 이방의 눈이 곁눈질로 사령을 훑었다. 사령이 고개를 끄덕이고 뒤편으로 사라졌다.

사령은 곧 말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새 흰 나무였다. 대패질한 결이 고왔고 테두리는 자로 잰 듯 반듯했다. 아까 마당 한복판에서 본, 검게 절고 닳아 있던 그 말이 아니었다.

막동의 눈이 말 테두리에 꽂혔다. 한 귀퉁이, 이가 빠져 있던 자리가 없었다. 손끝으로 쓸어도 걸리는 데가 없을 것 같은 매끈한 모서리였다.

엎드린 노인이 고개를 조금 들었다. 흙먼지 묻은 눈이 사령의 손에 들린 말에 가 닿았다.

“…이 말이 아니온데…”

곁에 선 사령이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말은 없었다. 눈길 하나가 노인의 정수리를 눌렀다.

노인은 입을 다물었다. 다시 이마를 땅에 댔다. 손녀가 그 등에 얼굴을 묻었다.

이방이 다시 웃었다. 굳었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펴져 있었다.

“우리 고을 관두(官斗)이옵니다. 한양 치수 그대로이옵니다.”

“…아까 그 말을 가져오란 말이다.”

“관아 말은 이것 하나뿐이옵니다, 나리.”

정적이 내려앉았다.

대청 위에서 사또가 코를 골았다. 드르렁, 하고 길게 끌다가 푸우, 하고 끊겼다. 그 소리가 마당의 고요를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

막동이 이방을 보았다. 이방이 마주 보며 웃었다. 입꼬리가 흐트러짐 없이 올라가 있었다.

막동의 목울대가 한 번 움직였다. 아까 그 말은 검었고 닳았고 귀퉁이가 빠져 있었다.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그걸 내놓으라고 할 근거가 막동에게는 없었다. 손에 쥔 것이라고는 제 눈이 본 것뿐이었다.

“…노인은 돌려보내라. 자루도 같이.”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사령들이 노인을 일으켜 세웠다. 노인은 손녀를 품에 안고, 자루를 받아 들고, 몇 번이나 허리를 꺾으며 뒷걸음으로 물러갔다. 이방이 그 뒤에서 깊이 허리를 숙였다.

막동은 등을 돌려 대청으로 돌아섰다.

그 등 뒤에서 이방이 몸을 일으켰다. 웃음은 그대로 얼굴에 걸어 둔 채, 곁에 선 사령에게만 보이도록 입술을 움직였다. 소리는 거의 없었다.

“…그 말은 창고 깊숙이.”

사령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 속삭임을 들은 사람은 마당에 아무도 없었다.

7. 저희처럼 드시네

저녁 객사 방에는 해 진 뒤의 푸르스름한 기운이 고여 있었다.

문이 열리고 열두 살쯤 된 관노 소년이 제 몸만 한 밥상을 들고 조심조심 들어왔다. 상다리가 걸을 때마다 달그락거렸다. 소년은 한 걸음마다 숨을 멈추고 밥그릇의 국이 넘치지 않는지 살폈다. 돌이였다.

“어사 나리, 진지 올립니다.”

돌이는 상을 방 한가운데 내려놓고 물러앉았다. 고봉으로 퍼 담은 밥, 김이 나는 국, 푸성귀 몇 가지가 올라 있었다. 막동이 상을 내려다보았다.

막동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늘 하던 대로 밥그릇과 국그릇을 상에서 내려 두 손에 들었다. 그러고는 문간 쪽 맨바닥으로 가 쪼그려 앉았다. 종이 부엌 구석에서 먹던 자리였다. 상 앞에 앉아 밥을 먹어 본 적이 없는 몸이었다.

밥에 국을 부어 말았다. 그릇째 들고 숟가락을 퍼 넣었다. 후루룩, 소리가 났다.

돌이가 빈 상을 보았다. 반찬만 덩그러니 남은 상이었다. 그러고는 문간에 쪼그려 앉은 어사를 보았다. 눈이 동그래졌다.

“…어사 나리가… 저희처럼 드시네.”

막동의 숟가락이 입 앞에서 멈췄다. 볼이 미어진 채로 몸이 굳었다. 밥알 하나가 입가에 붙어 있었다.

꿀꺽.

막동은 입안의 것을 삼키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릇을 들고 상 앞으로 걸어가 바로 앉았다. 허리를 곧게 폈다. 턱을 들었다. 입가의 밥알은 손등으로 슬쩍 훔쳤다.

“…암행은 원래 이리 먹는 것이다. 백성처럼 먹어야 들키지 않는 법이니라.”

돌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아…!”

돌이는 그대로 넙죽 엎드렸다. 이마가 방바닥에 닿는 소리가 퉁 하고 났다.

“소인 돌이이옵니다! 무엇이든 시키십쇼!”

그때 문간에 기대선 그림자가 움직였다. 구렁이가 상 위로 손을 뻗어 전 한 쪽을 집어 입에 넣었다.

“…들키지 않는 법이라. 이히.”

막동이 구렁이를 흘겨보았다. 눈에서 불이 나올 판이었다. 돌이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직 막동만 우러러보고 있었다.

일어나 나가려던 돌이가 문 앞에서 멈칫했다. 뭔가 생각난 얼굴이었다.

“아, 그리고 이방 어른께서요, 나리 보따리엔 뭐가 들었나 여쭤 보라 하셨는뎁쇼.”

막동의 손이 저도 모르게 품으로 갔다. 저고리 안쪽, 봉서가 있는 자리였다. 손바닥 밑에서 딱딱한 모서리가 만져졌다.

문간의 구렁이가 전을 우물거리다 멈췄다. 씹던 것이 입안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뭐가 들었나. 이히.”

막동은 헛기침을 했다. 한 번, 그리고 한 번 더.

“…밥그릇 들었다 하거라. 어사 밥그릇.”

“예! 밥그릇!”

돌이는 무슨 대단한 군령이라도 받은 얼굴로 뛰어나갔다. 맨발이 마루를 탁탁 두드리다 멀어졌다.

방에는 세 가지가 남았다. 식어 가는 국, 반쯤 비운 밥그릇, 그리고 아직 품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 막동의 손이었다.

구렁이가 그 손을 보았다.

8. 하루만 더

밤이 깊었다.

등잔 하나가 방을 겨우 밝히고 있었다. 방 한구석에 나리의 갓이 놓여 있었다. 문간 어둠 속에서는 구렁이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눈을 감았고, 입을 벌린 채 코를 골았다. 드르렁, 푸우, 드르렁.

막동이 문간을 돌아보았다. 코 고는 소리는 고르게 이어졌다.

막동은 낮에 받은 세곡 장부를 집어 들었다. 무릎걸음으로 갓 앞에 가 앉았다. 갓은 얌전히 놓여 있었다. 막동은 그 앞에 장부를 펴 놓았다.

“나리… 이거, 뭐라고 써 있는 겁니까.”

갓은 대답이 없었다. 등잔불만 한 번 일렁였다.

“…나리처럼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요.”

언젠가 들은 말이 귓가에 돌아왔다. 나리처럼만 하면, 아무도 종놈인 줄 모를 거야.

막동은 장부를 한 장 넘겼다. 손가락이 글자 위를 헤맸다. 먹으로 그은 획들이 가로세로 얽혀 있었지만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막동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글자 한 자를 못 읽습니다.”

막동은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보았다. 창호지 너머는 어둡고, 어둠 속으로 밤길이 뻗어 있을 터였다. 이어서 방구석의 봇짐을 보았다. 싸 두면 일각이면 떠날 짐이었다.

“오늘 그 이방이란 자가요… 기별 듣고 기다렸다더이다. 나리 가실 데를 알던 놈이… 바로 저 골목에 삽니다.”

막동은 일어났다. 봇짐 쪽으로 반 걸음을 뗐다.

그리고 멈췄다.

눈앞에 낮의 얼굴이 스쳤다. 흙바닥에 이마를 대던 노인이 있었다. “…이 말이 아니온데…” 하다가 사령의 눈길 한 번에 입을 다물던 얼굴이었다. 그 등에 얼굴을 묻은 손녀와, 손녀 앞에 놓여 있던 텅 빈 그릇도 보였다.

막동의 발이 방바닥에 붙었다.

막동은 한참 서 있다가 돌아왔다. 갓 앞에 다시 앉았다. 펼쳐 둔 장부를 천천히 덮었다.

“…하루만. 딱 하루만 더 빌리겠습니다. 누가 알고 있었는지… 그 말이 어디로 갔는지, 그것만 보고 돌려드릴게요.”

방 안이 고요해졌다.

코 고는 소리가 멎어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문간 어둠 속에서 구렁이의 눈이 떠져 있었다. 처음부터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다 들은 눈이었다. 이번에는 「이히」가 없었다. 구렁이는 갓 앞에 웅크린 막동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 갓을 보았고, 덮인 장부를 보았다. 웃지 않았다.

막동이 불현듯 고개를 돌렸다.

구렁이는 눈을 감고 있었다. 입을 헤 벌리고 다시 코를 골기 시작했다. 드르렁, 푸우.

막동은 한참 그쪽을 보다가 숨을 내쉬었다. 자리에 누웠다. 품에서 봉서를 꺼냈다가 도로 깊숙이 밀어 넣었고, 두 팔로 가슴께를 끌어안았다. 돌이가 전하고 간 말이 가시처럼 걸려 있었다. 보따리엔 뭐가 들었나.

막동의 숨이 차츰 고르게 가라앉았다.

창호지 너머로 삿갓 쓴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지나갔다. 막동은 보지 못했다.

9. 그 하인

어두운 뒷골목에 달빛이 담장 위로만 얕게 걸려 있었다.

막동이 잠든 뒤 객사를 빠져나온 구렁이가 그 골목을 걸어왔다. 발소리는 없었다. 구렁이는 어느 집 쪽문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손마디로 문짝을 두드렸다.

톡, 톡, 톡.

세 번이었다. 잠시 뒤 문이 빼꼼 열렸다. 구렁이는 몸을 비틀어 그 틈으로 들어갔고, 문은 다시 닫혔다.

이방의 방에는 등잔이 하나 켜져 있었다. 그 불빛 아래에 이방이 앉아 있었다. 구렁이는 방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낮에 객사 문간에서 하던 자세 그대로였다.

이방은 구렁이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자 품엔 무엇이 들었더냐?”

구렁이가 씩 웃었다. 누런 이가 드러났다. 입이 열렸다 —

그 순간 방문이 닫혔다.

문짝이 맞닿는 소리와 함께 등잔불이 흔들렸고, 그 뒤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구렁이의 대답은 문 안쪽에 갇혔다.

깊은 밤, 객사 방이었다.

막동이 품을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등잔 심지는 많이 짧아져 불꽃이 가물거렸다. 문간 구렁이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벽에 기대 있던 그 자리에는 눌린 자국만 남아 있었다.

창호지 문이 열렸다. 소리는 없었다. 경첩이 울지 않도록 문짝을 한 치씩 밀어 연 손이었다.

이방이었다. 낮과 같은 갓과 도포 차림이었고, 버선발이었다. 발바닥이 방바닥에 닿는 소리마저 지워 놓은 걸음이었다. 이방은 잠든 막동의 머리맡에 가만히 앉았다.

이방은 소매에서 접힌 편지 한 장을 꺼냈다. 며칠 전 한양에서 내려와 있던 편지였다. 이방은 그것을 펴서 머리맡 등잔 불빛에 비추었다. 누렇게 비친 종이 위로 먹글씨가 어른거렸다.

“…고개에서 하인 하나가 마패를 쥐고 달아났다. 그 하인이 나타나거든, 건드리지 마라. 무얼 쥐고 있는지… 보라.”

이방은 편지를 다시 한 번 눈으로 훑었다. 그러고는 종이 끝을 등잔불에 대었다.

불이 종이를 물고 올라왔다. 글자가 한 줄씩 시커멓게 말려 들어갔다. 이방은 불이 손끝에 닿기 직전까지 쥐고 있다가 놓았다. 타다 남은 조각이 하늘하늘 떨어졌다. 검은 재가 등잔 받침 위에 내려앉았다.

이방의 눈이 잠든 막동에게로 옮겨 갔다. 이방은 막동의 품으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끝이 저고리 깃에 닿기 직전이었다 —

“…나리…”

막동이 몸을 뒤척였다. 돌아누우며 품을 더 힘껏 끌어안았다. 이방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였다.

막동의 숨소리가 다시 고르게 이어졌다.

이방은 손을 거두었다. 소매 속으로 거두어들이고는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눈은 웃지 않았다.

“…하인이었구먼.”

이방이 일어났다. 버선발이 방바닥을 스치고 문 앞에서 그림자가 사라졌다. 창호지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방에는 등잔불과 막동이 남았다. 등잔 받침에는 검은 재가 한 줌 쌓여 있었다. 막동은 깨지 않았다. 품을 끌어안은 채 숨소리만 고르게 내쉬었다.

— 다음 화 「사또의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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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사또의 잔치
넷째 날 아침, 객사 창호지 문으로 희뿌연 햇살이 스며들었다. 품속을 두 팔로 잔뜩 끌어안은 채 새우잠을 자던 막동이 퍼뜩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거친 오른손이 본능적으로 저고리 앞섶 안쪽부터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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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CAL VERIFICATION · 정조 18년 (1794) 사료 고증

가짜 어사 — 조선 후기 암행어사 제도 및 삼정(三政) 문란 고증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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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행어사 임명장 세트(봉서·사목·마패·유척): 어사로 임명된 당하관 문신은 승정원에서 봉서(封書: 출두할 고을 지명이 적힌 밀봉 문서), 사목(事目: 감찰 수칙서), 마패(馬牌: 역마 징발패), 유척(鍮尺: 도량형 및 형구 검수용 놋쇠 자)을 하사받았다.
  • 봉서 개봉 원칙(남대문 밖 개봉): 봉서 겉면에는 '도성 문(숭례문 등) 밖에서 개봉할 것'이 명기되어, 어사 본인도 성문을 나서기 전까지는 자신의 암행 목적지(경기 풍곡현)를 알지 못했다.
  • 세곡(稅穀) 수탈과 되·말(斗斛) 조작: 조선 후기 지방 아전(호방·이방)들은 세곡 수납 시 법정 규격보다 배가 부른 큰 되를 사용해 백성들의 쌀을 초과 징수(모곡)하고, 어사 감찰 시에는 정상 규격의 되로 바꿔치기해 유척 검수를 피하려 했다.